2015년 10월 6일 화요일

'시카리오', 매우 파워풀한 멕시코 마약 카르텔 버전 '제로 다크 서티'

베니치오 델 토로(Benicio Del Toro)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마약'이다. 그의 출연작 중 마약과 관련된 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델 토로는 마약 딜러부터 시작해서 마약 중독자, 마약 단속반 요원 등 마약과 관련된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델 토로는 영화배우 데뷔 시절부터 마약과 관련있었다. 델 토로는 그의 초기 출연작인 1989년 제임스 본드 영화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에서부터 마약 카르텔 헨치맨, 다리오 역을 맡으면서 강한 인상을 남기더니 2000년 영화 '트래픽(Traffic)'에선 마약 딜러를 추적하는 멕시코 경찰 역으로 출연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007 시리즈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 본드걸로 출연했던 여배우 할리 베리(Halle Berry)와 007 시리즈 헨치맨 출신 델 토로가 함께 출연한 2007년 영화 '씽스 위 로스트 인 더 파이어(Things We Lost in the Fire)'에선 마약에 심하게 중독된 캐릭터를 맡았으며, 2014년 영화 '에스코바: 파라다이스 로스트(Escobar: Paradise Lost)'에선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 두목 파블로 에스코바(Pablo Escobar) 역으로 출연했다.

이처럼 마약 관련 영화에 자주 출연해온 델 토로가 또 마약 영화에 출연했다.

라이온스게이트의 액션 스릴러 '시카리오(Sicario)'가 바로 그것이다.

'시카리오'의 출연진은 화려한 편이다. 베니치오 델 토로와 함께 에밀리 블런트(Emily Blunt), 죠시 브롤린(Josh Brolin), 제프리 도노반(Jeffrey Donovan), 빅터 가버(Victor Garber) 등이 출연한다. 죠시 브롤린은 미국 국방부의 태스크 포스 팀 리더, 그레이버 역을 맡았고 베니치오 델 토로는 태스크 포스 팀에 컨설턴트로 참여한 미스터리한 사나이, 알레한드로 역을 맡았다. 에밀리 블런트는 FBI SWAT 팀 에이전트에서 죠시 브롤린의 DoD 태스크 포스 팀으로 갑자기 자리를 이동한 케이트 역을 맡았으며, 빅터 가버는 케이트의 보스 역으로 출연했다.

연출은 2013년 스릴러 영화 '프리즈너스(The Prisoners)'를 연출한 캐나다 영화감독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가 맡았고, 촬영감독은 로저 디킨스(Roger Deakins)가 각각 맡았다.

영화 '시카리오'는 애리조나에서 멕시코 마약 딜러들을 추적하던 FBI 에이전트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영문도 모른채 그레이버(죠시 브롤린)가 이끄는 미국 국방부의 태스크 포스 팀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케이트는 법대로, 원칙대로 사건을 해결하는 타잎이지만 태스크 포스 팀 멤버들은 그녀와 정 반대의 방법으로 작전을 벌인다. 뿐만 아니라 그레이버와 태스크 포스 팀 컨설턴트로 참여한 차갑고 미스터리한 사나이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케이트에게 그들이 벌이고 있는 작전에 대해 자세한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케이트는 그레이버와 알레한드로의 스타일을 맘에 들어하지 않지만 내키지 않아도 하는 수 없이 태스크 포스 팀과 함께 멕시코 마약 카르텔 두목을 추적하는 작전에 가담한다...


'시카리오'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버전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라고 할 수 있는 영화였다. '제로 다크 서티'를 멕시코 마약 카르텔 버전으로 리메이크한다면 '시카리오'가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영화간 유사점이 상당히 많았다. CIA 오피서 역을 맡았던 제시카 채스테인(Jessica Chastain)을 FBI 에이전트를 맡은 에밀리 블런트로 바꾸고 네이비 실스를 DoD 태스크 포스 팀으로 바꾼 다음 작전 지역을 파키스탄에서 멕시코로 바꾸면 '시카리오'였다. '두목'을 잡기 위해 정식이 아닌 방법을 동원한다는 플롯도 흡사했으며, 미국과 멕시코 지역의 건조한 풍경도 '제로 다크 서티'에 등장했던 중동 지역과 비슷해 보였다. 중무장한 태스크 포스 팀이 나잇비젼 고글을 착용하고 작전을 벌이는 장면을 나잇비젼 시점으로 보여주는 씬 역시 '제로 다크 서티'의 네이비 실스를 연상시켰다.

그렇다. '시카리오'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 문제를 다룬 범죄영화였으나 영화 자체는 범죄영화가 아니라 전쟁영화 같았다. 정보부가 수집한 정보를 특수부대에게 제공하면 특수부대가 적진을 들락거리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줄거리의 전쟁-밀리터리 영화를 생각하면 된다.

줄거리는 흥미로운 편이었다. 선한 쪽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미심쩍은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는 설정은 영화감독 드니 빌뇌브의 2013년 영화 '프리즈너스'와 겹쳤다. 지난 '프리즈너스'에선 피해자 가족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줬다면 이번 '시카리오'에선 멕시코와의 국경 근처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한 인내가 바닥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바다 건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제작진이 '제로 다크 서티'를 탬플릿으로 삼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남의 나라 얘기처럼 무관심을 보이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바로 코앞에 전쟁터가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을 듯 하다. 영화 '시카리오'는 무조건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범위를 좀 넓혀서 '시카리오'의 태스크 포스 팀처럼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아니면 그보다 더욱 강하게 개입할 필요성이 있는가를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영화였다.

출연진도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에밀리 블런트는 처음엔 영화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헐리우드에 강한 여성 캐릭터가 부족하다는 리버럴 진영의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에밀리 블런트에게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역을 억지로 맡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요새는 여자, 게이, 소수인종 등이 출연하는 영화를 보면 '다양성(Diversity)'을 의식한 캐스팅이 아닌가를 제일 먼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실제로, '시카리오'에서 에밀리 블런트가 맡은 FBI 에이전트 역할이 원래는 남자 캐릭터였으나 이후에 여성으로 바뀐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처음엔 에밀리 블런트의 캐스팅을 달갑지 않게 바라봤다. 남자 배우가 맡아야 자연스러운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다양성' 문제를 의식한 제작진이 여성으로 바꾼 것 같다는 냄새가 났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남자 배우가 FBI 에이전트 역할을 맡았다면 소심한 겁쟁이 캐릭터가 됐을 것 같았다. 어둡고 포악한 늑대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역할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그럴 듯해 보였을 것 같았다. 에밀리 블런트는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FBI 에이전트 역을 잘 소화했다.

죠시 브롤린과 베니치오 델 토로는 모두 각자의 역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브롤린은 건들거리는 터프가이 역에 잘 어울렸고 델 토로는 차갑고 미스터리한 사나이 역으로 완벽했다. 특히 베니치오 델 토로의 존재감이 대단히 컸다. '시카리오'는 베니치오 델 토로의 영화라고 해야 정확하다. 에밀리 블런트가 주연인 것은 사실이지만 베니치오 델 토로가 빠진 '시카리오'는 상상할 수 없었다. 블런트의 이야기보다 델 토로의 이야기가 훨씬 흥미로웠으며, 차갑고 미스터리한 "COOL FUCKER" 델 토로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델 토로는 '시카리오'의 알레한드로 역으로 앞으로 열릴 헐리우드 영화제에서 남우조연 후보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시카리오'는 매우 만족스러운 파워풀한 영화였다. 매우 신선한 영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스토리는 흥미진진했고 액션 씬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나왔으며 출연진 모두가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어지러운 상황을 그린 무거운 테마의 영화였으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무겁고 어두운 톤으로 짖누르는 영화는 아니었으며, 곳곳에 코믹한 씬을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플롯에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이 더러 있었으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흠잡을 데가 많지 않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영화 '프리즈너스'를 기대 이상으로 재밌게 보고나서 프랑스-캐나다 영화감독 "드니 빌뇌브"라는 이름을 기억해뒀는데, 역시 그의 2015년 신작 '시카리오'도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열릴 여러 헐리우드 무비 어워즈에서 '시카리오'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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