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6일 토요일

'007 스펙터': 만약 여가수가 'Writing's on the Wall'을 불렀다면?

지난 9월 초 샘 스미스(Sam Smith)가 '007 스펙터(SPECTRE)' 주제곡을 부르는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을 때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샘 스미스가 이미 한참 전부터 '007 스펙터'의 주제곡을 부를 유력 후보로 지목되어 왔으므로 크게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샘 스미스가 007 시리즈 주제곡에 어울리는 가수인가"에 물음표가 자꾸 붙었다. 영국의 유명한 여자 팝 스타 아델(Adele)이 지난 번 '스카이폴(Skyfall)'을 불렀으니 이번엔 영국의 유명한 남자 팝 스타 샘 스미스의 차례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개운치 않은 감이 있었다.

샘 스미스가 '007 스펙터' 주제곡을 부르게 됐다는 사실에 이어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건 주제곡의 제목이었다.

"Writing's on the Wall...?"

'스펙터'도 주제곡의 제목으로 나쁘지 않게 들렸는데 '노상방뇨'를 연상케 하는 제목을 굳이 고를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제목이 '스펙터'인 다소 음산하면서도 강렬한 주제곡이 나올 것을 기대했었는데, 주제곡의 제목이 'Writing's on the Wall'이라면 계산을 약간 다르게 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9월25일 샘 스미스가 부른 '007 스펙터' 주제곡 'Writing's on the Wall'이 공개되었다.

과연 이번엔 걸작이라 불릴 만한 007 시리즈 주제곡이 나온 걸까?

일단 들어보기로 하자.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곡은 존 배리가 스코어를 맡았던 1985년 로맨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메인 테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메인 테마와 'Writing's on the Wall'의 공통점은 로맨틱한 분위기의 오케스트라 곡이라는 점이다. 만약 '아웃 오브 아프리카' 메인 테마에 가사를 붙여 남자 가수가 부른다면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과 비슷한 곡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일단 곡 자체는 지난 '스카이폴'보다 맘에 들었다. 007 시리즈 음악으로 유명한 존 배리(John Barry)의 클래식 스코어를 연상케 하는 스트링 파트도 맘에 들었으며,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의 80년대 팝 발라드 곡을 연상케 하는 보컬 파트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가성으로 부르는 후렴부에서 약간 인상이 찡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007 주제곡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애절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남자 가수가 부른 애잔한 풍의 발라드를 즐겨 듣지 않아서 약간의 거부감(?)이 발동된 듯 하다.

그렇다.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을 듣는 동안 만족감과 실망감이 교차되었다.

곡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부적합해 보였다. 007 시리즈 주제곡 중에도 잔잔한 러브송이 있었으므로 'Writing's on the Wall'이 러브송이라는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 보컬이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애잔한 발라드를 부른 적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낸시 시나트라(Nancy Sinatra)가 부른 1967년작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 주제곡, 칼리 사이먼(Carly Simon)이 부른 1977년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의 주제곡 'Nobody Does It Better)', 쉬나 이스턴(Sheena Easton)이 부른 1981년작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 주제곡, 리타 쿨리지(Rita Coolidge)가 부른 1983년작 '옥토퍼시(Octopussy)' 주제곡 'All Time High', 글래디스 나이트(Gladys Knight)이 부른 1989년작 '라이센스 투 킬(Licence to Kill)' 주제곡 등 러브송 스타일의 007 시리즈 주제곡이 과거에도 있었지만, 모두 여자 가수가 불렀다. 맷 먼로(Matt Munro)가 부른 1963년작 '위기일발/프롬 러시아 위드 러브(From Russia with Love)' 주제곡을 감미로운 러브송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남자 가수가 부른 발라드 러브송이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채택된 적이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Writings' on the Wall' 가사를 살펴보면 영화 '007 스펙터'에서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와 매들린 스완(레아 세두)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눈에 띈다.
How do I live? How do I breathe?
When you're not here I'm suffocating
I want to feel love, run through my blood
Tell me is this where I give it all up?
For you I have to risk it all
Cause the writing's on the wall
'007 스펙터'의 클라이맥스 파트에 매들린이 본드와 함께 가지 않겠다면서 "When you decide James, that you want to leave this life, I'll be here for you. But I won't wait forever..."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가사 내용이 그 파트를 의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Writing's on the Wall'은 제임스 본드 관점의 러브송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제임스 본드의 애절한 심정을 묘사한 곡을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삼는 게 적절한가?

여성 가수가 부른 러브송은 문제될 게 없다. '본드걸이 본드에게 바치는 로맨틱한 곡'으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가수가 부른 러브송은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어색하게 들린다. 007 시리즈가 로맨스 영화가 아니고 제임스 본드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남자 가수가 부른 애절하고 로맨틱한 스타일의 곡이 007 시리즈 주제곡이 되면 어딘가 약간 수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샘 스미스는 1965년작 '썬더볼(Thunderball)'의 주제곡을 부른 톰 존스(Tom Jones) 이후 50년만에 007 시리즈 주제곡을 부른 영국 남성 솔로 가수가 됐다. 그러나 톰 존스가 부른 '썬더볼'과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을 비교해 보면 천지차이가 난다.

우선 '썬더볼'을 들어보자.


곡의 분위기 뿐만 아니라 가사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난다.

그럼 '썬더볼'의 가사를 살펴보자.
He always runs while others walk.
He acts while other men just talk.
He looks at this world, and wants it all.
So he strikes, like Thunderball.
He knows the meaning of success.
His needs are more, so he gives less.
They call him the winner who takes all.
And he strikes, like Thunderball.

Any woman he wants, he'll get.
He will break any heart without regret.
His days of asking are all gone.
His fight goes on and on and on.
But he thinks that the fight is worth it all.
So he strikes like Thunderball.
이처럼 톰 존스가 부른 '썬더볼'은 한마디로 '영웅찬가'다.

반면 샘 스미스가 부른 'Writing's on the Wall'은 나약하고 가녀린 느낌을 주는 러브송이다.

물론 007 시리즈 주제곡이 무조건 '썬더볼'처럼 마초적인 '영웅찬가'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남자 가수가 주제곡을 불렀으면 강하고 터프한 느낌을 살렸어야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보다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썬더볼' 이후 남자 가수가 부른 007 시리즈 주제곡을 살펴보자.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부른 1973년작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주제곡, 듀란 듀란(Duran Duran)이 부른 1985년작 '뷰투어킬(A View to a Kill)' 주제곡, 아하(a-ha!)가 부른 1987년작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 주제곡, 크리스 코넬(Chris Cornell)이 부른 2006년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 주제곡 'You Know My Name', 2008년 잭 화이트(Jack White)가 앨리씨아 키스(Alicia Keys)와 듀엣으로 부른 2008년작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 주제곡 'Another Way to Die' 등 남자 가수가 부른 주제곡 모두가 박력 넘치는 스타일의 곡이었다.

'Writing's on the Wall' 풍의 곡을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사용하려면 여자 가수가 불러야 훨씬 잘 어울리지 않을까?

만약 여자 가수가 'Writing's on the Wall'을 불렀다면?

코니 탤벗(Connie Talbot)이 부른 버전을 한 번 들어보자.


이 곡은 여자가 불러야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더욱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도 여전히 아델이 부른 지난 '스카이폴'보다는 샘 스미스의 'Writing's on the Wall'이 더 맘에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 가수가 부른 애절한 발라드 곡은 007 시리즈 주제곡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만약 아델이 'Writing's on the Wall'을 불렀다면 보다 멋진 곡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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