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이미테이션 게임', 2014년 최고의 영화라 불릴 만했다

영국영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특징은 '시대물'과 '바이오픽'이다. 영국영화 중에 과거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이 많고, 실존했던 인물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시대물'과 '바이오픽'에 모두 해당하는 영국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 바로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대전 당시 해독이 불가능해 보이던 독일군 암호기 이니그마(Enigma)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크게 공헌한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의 생애를 그린 시대물 + 바이오픽이다.

앨런 튜링은 영국의 시그널 인텔리전스 기관 GCHQ(Government Communications Headquarters)의 전신인 GC&CS(Government Code and Cypher School)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기 이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만든 극비의 코드브레이커 팀에 속해 있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40년대 초 튜링이 동료, 상관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빚으며 GC&CS에서 독일군의 이니그마를 해독할 장치를 개발하던 시절의 이야기, 튜링의 틴에이저 시절 이야기, 50년대 초 동성애가 불법이던 영국에서 튜링이 동성애 혐의로 적발된 이야기를 오가며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던 앨런 튜링의 생애를 그렸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베네닉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ch)는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역을 맡았으며, 이니그마 코드브레이커 팀의 여성 멤머 조앤 클라크 역은 키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 체스 플레이어 겸 암호해독가 휴 알렉산더 역은 매튜 구드(Matthew Goode), 2차대전 당시 MI6 국장이었던 스튜어트 멘지스(Stuart Menzies) 역은 마크 스트롱(Mark Strong) 등이 각각 맡았다.

영화의 연출은 노르웨이의 액션 스릴러 영화 '헤드헌터스(Headhunters)'를 연출했던 노르웨이 영화감독 모튼 틸덤(Morten Tyldum)이 맡았으며, 스크린플레이는 젊은 미국인 스크린라이터 그레이햄 무어(Graham Moore)가 맡았다.


과연 이들이 이름값을 했을까?

물론이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2014년 최고의 영화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영화였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의 생애를 그린 드라마, 2차대전 배경의 전쟁영화, 스파이 스릴러 영화 등 여러 쟝르를 숨가쁘게 오가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해독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던 독일군의 이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해 달려든 코드브레이커 팀의 흥미진진한 활약상, 동성애자라는 이유 때문에 애국자에서 전과자로 비참하게 전락한 앨런 튜링의 이야기 등 스토리가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했으며, 중간 중간에 배치된 풍부한 유머는 영화가 지나치게 딱딱하고 우중충해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맡았다.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면서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유머가 풍부했다는 점이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코드브레이커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 데다 당시 동성애가 불법이던 영국에서 동성애자로 적발되어 수난을 당한 앨런 튜링의 비참한 개인사 등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유머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테이션 게임'은 무겁고 우중충한 분위기의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위트 넘치는 유머가 상당히 풍부한 영화였다. 일부러 넣은 티가 나는 유치한 말장난 수준의 유머가 아니라 평범한 대화 씬에서 주고 받는 재치가 빛나는 유머러스한 대사들이 계속해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바로 이런 유머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필요하고 또 잘 어울리는 유머다. 하지만 최근에 와선 말솜씨, 글솜씨, 유머감각 등이 모두 제로인 작가가 제임스 본드 스크립트를 쓰는지 유머가 영 시원찮아졌다. "유머를 보강하라"고 하면 싱겁고 썰렁한 대사를 몇 줄 넣거나 우스꽝스러운 씬을 넣으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007 시리즈 스크린라이터들은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면서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싶다.

앨런 튜링 전기 '앨런 튜링: 이니그마(Alan Turing: The Enigma)'를 기반으로 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앞으로 열릴 헐리우드 무비 어워즈에서 각색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테이션 게임'이 각색 부문 후보에 오르는 건 개런티할 수 있을 정도며, 수상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이처럼 '이미테이션 게임'은 유머, 드라마, 스릴러 파트가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알맞게 균형을 이룬 크라우드-플리저(Crowd-Pleaser) 였다.

유머 파트가 기대 이상이었던 반면 감동을 주는 파트가 다소 약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동성애자로 적발된 이후에 튜링이 느꼈던 분노와 배신감 등이 충분하게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긴 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해서부터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즐길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본다.

출연진도 만족스러웠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괴짜 천재 게이 수학자 역에 아주 잘 어울렸으며, 진지하면서도 플레이보이 기질을 지닌 휴 알렉산더 역의 매튜 구드는 차기 제임스 본드 후보감으로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일 만큼 점잖고 깔끔하고 세련된 사나이의 모습을 보여줬다. MI6 국장 역으로 출연한 마크 스트롱도 과묵하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뽐내는 쿨한 사나이 역할에 아주 잘 어울렸으며, 파라마운트의 스파이 스릴러 영화 '잭 라이언(Jack Ryan)에 출연해 머리를 긁적이게 만들었던 키라 나이틀리도 제 자리로 돌아온 듯 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지금까지 본 2014년 작품상 후보감 영화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영화였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앞으로 열릴 헐리우드 무비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것으로 기대된다. 적어도 작품, 감독, 각색, 남우주연(베네딕트 컴버배치) 부문 노미네이션은 확정적인 듯 하다.

이제 남은 일은 '이미테이션 게임'이 앞으로 열릴 헐리우드 무비 어워즈에서 얼마나 많은 상을 받게 되나 지켜보는 일과 홈 비디오 버전으로 출시되는 날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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