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28일 목요일

'노벰버 맨', 기관총 맞은 플롯이 휘청였지만 그럭저럭 즐길 만

제임스 본드 스타 피어스 브로스난(Pierce Brosnan)이 스파이 액션 영화로 돌아왔다. 2002년 제임스 본드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를 끝으로 살인면허를 반납했던 브로스난이 미국 소설가 빌 그랜저(Bill Granger)의 스파이 스릴러 소설 '데어 아 노 스파이(There Are No Spies)'를 기초로 한 스파이 스릴러 영화 '노벰버 맨(The November Man)'으로 다시 스파이의 세계로 돌아왔다. 영화가 기초로 삼은 빌 그랜저의 소설 '데어 아 노 스파이'는 '노벰버 맨'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CIA 오피서 피터 데버러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파이 스릴러 시리즈 중 하나이다. 브로스난은 영화 '노벰버 맨'에서 메인 캐릭터 피터 데버러 역을 맡았다.

'노벰버 맨'엔 브로스난 뿐만 아니라 본드팬들에게 낯익은 얼굴이 또 하나 등장한다. 2008년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서 리딩 본드걸, 카밀 역을 맡았던 올가 쿠릴렌코(Olga Kurylenko)다. 쿠릴렌코는 '노벰버 맨'에서 메인 캐릭터 중 하나인 앨리스 역으로 출연했다.

'노벰버 맨'은 과거 007과 본드걸이 함께 리딩 롤을 맡은 흔치 않은 스파이 스릴러 영화다. 제작진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나긴 하지만 90년대 제임스 본드와 2000년대 본드걸 커플링이 시선을 끌 만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노벰버 맨'은 어떤 영화일까?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영화 제목과 소설 제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브로스난이 빌 그랜저의 소설을 기초로 한 스파이 스릴러 '노벰버 맨'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빌 그랜저의 첫 번째 '노벰버 맨' 시리즈 소설인 1979년작 '노벰버 맨(The November Man)'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가 한 둘씩 공개되면서 영화가 기초로 삼은 소설이 1979년작 '노벰버 맨'이 아니라 1987년작 '데어 아 노 스파이'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영화 제목은 '노벰버 맨'이지만 기초로 삼은 소설은 동명의 1979년 소설이 아니라 1987년작 '데어 아 노 스파이'인 것이다.

영화 제목은 '노벰버 맨'이면서 기초로 한 소설은 '데어 아 노 스파이'인 바람에 약간 헷갈리긴 했지만, 제작진이 하필이면 왜 '데어 아 노 스파이'를 선택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은퇴한 CIA 오피서가 다시 스파이의 세계에 휘말린다는 '데어 아 노 스파이'의 플롯과 2002년작 '다이 어나더 데이'를 끝으로 007 시리즈를 떠났던 브로스난이 다시 스파이 영화로 돌아온 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은 '노벰버 맨'(왼쪽)이지만 기초로 한 소설은 '데어 아 노 스파이'(오른쪽)'
그러나 영화 노벰버 맨'이 어느 소설을 기초로 삼았는지 진지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왜냐, 공식적으로는 '데어 아 노 스파이'를 기초로 삼은 것으로 돼있지만 영화 줄거리는 소설의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은퇴했던 CIA 오피서 피터 데버러(피어스 브로스난)가 본의 아니게 다시 스파이의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는 점, 여성 킬러가 등장한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곤 영화에서 소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초적인 몇 가지 설정을 제외한 나머지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다. 빌 그랜저의 소설 '데어 아 노 스파이'를 읽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그 소설을 기초로 한 게 맞나 의심이 들 것이다.

소설을 기초로 했다면서도 80% 이상의 줄거리가 소설의 것과 다른 영화는 많다. 그러나 원작 소설에 충실하게 영화로 옮기지 않았다고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할 순 없다. 영화를 보다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거리를 거의 새로 다시 쓰다시피 하는 대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더욱 좋지 않게 나오면 문제가 된다. 그냥 원작 그대로 옮기지 왜 뜯어 고쳐서 더욱 이상하게 망쳐놨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많은 제임스 본드 영화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노벰버 맨'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노벰버 맨'은 기관총에 맞은 듯 숭숭 구멍이 뚫린 플롯 때문에 망한 영화였다.

영화 '노벰버 맨'은 CIA에서 은퇴한 피터 데버러(피어스 브로스난)가 옛 친구이자 CIA 동료인 헤인리(빌스미트로비치)로부터 러시아에 가서 여성 에이전트로부터 정보를 받아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시 스파이의 세계에 들어섰다가 일이 꼬이면서 데버러가 과거에 훈련시켰던 젊은 CIA 오퍼레이티브 메이슨(루크 브레이시)이 이끄는 CIA 팀에 쫓기는 도망자 신세에 놓인다는 줄거리다. 데버러는 미스테리의 핵심인 체첸에서 발생했던 전쟁 범죄 목격자를 찾는 과정에서 깜쪽같이 사라진 목격자와 커넥션이 있는 앨리스(올가 쿠릴렌코)를 만나 그녀와 함께 메이슨이 이끄는 CIA 팀과 러시안 여성 킬러 알렉사(아밀라 터지메힉)를 피해 도망다니면서 사건을 풀어간다...

제작진이 어떤 줄거리의 영화를 만들려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당히 허술하고 말이 잘 되지 않는 스토리를 만들어놓는 데 그쳤다.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불확실한 스파이의 세계에 반전과 미스테리를 보탠다는 아이디어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제작진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 억지스럽고 말이 안 되는 플롯 설정을 하면서 허점 투성이의 플롯을 만들어놨다. 적과 동지가 불확실한 스파이의 세계는 얄팍한 관객 속이기가 전부였으며, 체첸에서 발생했던 전쟁 범죄의 목격자를 찾는 메인 미스테리는 너무 억지스럽게 짜맞춘 티가 심하게 났다.

한가지 재밌는 건 호주 영화배우 루크 브레이시(Luke Bracey)가 맡은 캐릭터, 메이슨이었다. 메이슨은 빌 그랜저의 소설 '데어 아 노 스파이'의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던 게 전부인 캐릭터다. 메이슨은 소설에선 CIA 오퍼레이티브가 아니라 데버러에 차를 빌려주는 평범한 청년이었으며, 마지막에 데버러가 그를 CIA로 끌어들인다. 그런데 영화버전에선 데버러(피어스 브로스난)가 훈련시킨 젊은 CIA 오퍼레이티브로 변신하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데버러를 죽이라는 CIA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스승 vs 제자, 스파이 vs 스파이 서브플롯을 진행시키는 비중이 큰 캐릭터로 바뀌었다. 신선할 것이 없는 설정인 것은 사실이지만 소설에서 비중이 매우 작았던 메이슨을 메인 캐릭터 중 하나로 변신시키면서 젊은층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역할까지 맡긴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노벰버 맨'에서 브로스난과 함께 투톱을 이뤘다고 하기엔 아직 부족한 감이 많았지만 루크 레이시는 앞으로 눈여겨 볼 만했다.


플롯 문제를 넘어가면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신선도다. '노벰버 맨'은 제이슨 본(Jason Bourne) 시리즈와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엉거주춤하게 따라하는 데 그친 영화였다. CIA에 쫓기는 데버러는 제이슨 본과 겹쳐졌고, 플롯과 등장 캐릭터는 놀라울 정도로 2008년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와 흡사했다. 단지 '콴텀 오브 솔래스'에 출연했던 여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노벰버 맨'에도 출연했기 때문이 아니다. '노벰버 맨'에서 쿠릴렌코가 연기한 앨리스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 그녀가 연기했던 카밀과 공통점이 상당히 많은 캐릭터였다. '콴텀 오브 솔래스'의 카밀의 배경 이야기와 '노벰버 맨'의 앨리스의 배경 이야기는 사실상 거의 똑같아 보였다. 만약 피어스 브로스난 주연으로 '콴텀 오브 솔래스'를 리메이크한다면 '노벰버 맨'이 나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 씬은 나름 스릴 있었다. 액션 씬의 비중도 적당했다. 액션 씬이 쓸데 없이 너무 많지도 않았고 따분해질 정도로 부족하지도 않았다. 기억에 남을 만한 하이라이트 씬은 없었지만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알맞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액션 씬은 요새 나온 액션 스릴러 영화 클리셰 투성이였으며, 액션 씬을 쓸데 없이 스타일리쉬하게 연출하려 한 흔적이 보였다. 특히 슬로우모션 격투 씬에선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피어스 브로스난, 로저 도널드슨(Roger Donaldson) 등 60대에 접어든 배우와 감독이 제작, 주연, 감독을 맡은 영화였기 때문에 괜시리 나이 많은 사람들이 요새 유행하는 영화를 어설프게 흉내낸 것처럼 보이기 딱 알맞았다. 스타일리쉬한 게 아니라 되레 유치해 보였다.

이처럼 '노벰버 맨'은 눈에 띄는 많은 문제점들로 얼룩진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제법 즐길 만했다. 기관총 맞은 플롯에 영화가 휘청였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스파이 액션 영화에 낯익은 얼굴인 피어스 브로스난 덕분이었을까? 브로스난이 제임스 본드였을 당시 그를 훌륭한 제임스 본드로 평가한 적이 없지만 브로스난이 여러 편의 액션-스파이-스릴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그쪽 쟝르와 친숙한 얼굴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면 리앰 니슨(Liam Neeson) 주연의 올드 액션 히어로 영화 스타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테이큰(Taken)' 시리즈를 비롯한 리앰 니슨 주연의 액션 스릴러 영화 여러 편에도 플롯에 물음표가 붙곤 했다.

아무튼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도 플롯을 꼼꼼히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즐기기엔 과히 나쁘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 플롯 덕분에 머릿 속이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도저히 못 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주 흥미진진하고 익사이팅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인 영화도 아니었다.

'노벰버 맨'이 AAA급 스파이 스릴러 영화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허점 없는 꼼꼼한 줄거리의 스마트한 스파이 액션 스릴러 영화를 기대한다면 '노벰버 맨'은 쳐다 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낯익고 친숙하고 여기저기 허점이 많으면서도 왠지 싫진 않은 고만고만한 수준의 영화를 기대한다면 아주 크게 실망하진 않을 것이다. 피어스 브로스난의 '테이큰' 격인 영화라고 생각하고 기대치를 약간 낮게 잡고 본다면 대단히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기대했던 것보단 나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것도 시리즈화 될 모양이다. 빌 그랜저가 남긴 '노벰버 맨' 시리즈 소설이 15권이나 되는 만큼 소스는 충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영화 '노벰버 맨'에서 은퇴했던 스파이 데버러가 다시 스파이의 세계로 돌아왔고 데버러가 키운 젊은 CIA 오피서 메이슨까지 소개시켰으므로 줄거리를 이어갈 기반도 어느 정도 마련된 듯 하다.

다만 한가지 부탁이 있다면, 다음 번 영화에선 방탄조끼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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