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4일 토요일

클라이브 오웬의 007 영화 '인터내셔널'

클라이브 오웬이 제임스 본드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은 클라이브 오웬이 피어스 브로스난을 대신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클라이브 오웬에 의하면 007 제작진으로부터 아무런 제의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것이 '오피셜'이다.

이렇게 해서 클라이브 오웬의 '살인면허의 꿈'은 사라졌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비슷한 영화는 많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제임스 본드 쟝르'에 해당하는 액션-스파이-스릴러 영화는 찾아보면 상당히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화에 출연해 클라이브 오웬의 '제임스 본드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이 바로 이러한 영화다.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

영화 '인터내셔널'에서 클라이브 오웬은 무기밀매, 암살 등을 일삼는 거대은행 IBBC의 뒤를 캐는 인터폴 에이전트, 루이 샐린저 역을 맡았다. 루이 샐린저는 제임스 본드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 않은 캐릭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IBBC가 거대은행인 정도가 아니라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과 '콴텀 오브 솔래스(Quantum of Solace)'에 등장한 범죄조직, 콴텀(Quantum)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미스터 화이트'라는 이름의 캐릭터까지 나오더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좁은 절벽도로가 나오는 씬에선 영락없이 '콴텀 오브 솔래스'의 카체이스씬이 떠올랐다. 카체이스씬은 나오지 않았지만 '콴텀 오브 솔래스'의 로케이션을 거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기 때문이다. 꼭 '콴텀 오브 솔래스'가 아니더라도 007 시리즈 카체이스씬에 절벽을 낀 좁은 커브길이 자주 나왔기 때문인지 007 시리즈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근 액션영화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지붕 위로 뛰어다니며 쫓고 쫓기는 추격씬인 'ROOFTOP CHASE'까지 나왔다.

'ROOFTOP CHASE' 얘기가 나온 김에 역사를 살짝 한번 되돌아 보기로 하자.

지붕 위를 달리는 추격씬이 많은 액션영화에 나왔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티모시 달튼의 1987년 제임스 본드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s)'다.


▲'리빙 데이라이트(1987)'

'지붕 달리기'는 2007년 영화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에도 나온다. 아직도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지붕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본 얼티메이텀을 따라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위의 '리빙 데이라이트'와 아래의 '본 얼티메이텀'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본 얼티메이텀' 제작진이 지붕씬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따온 것인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본 얼티메이텀(2007)'

문제는 '본 얼티메이텀'만 클래식 제임스 본드 영화를 따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2008년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에서도 지붕 위를 달리는 추격씬이 나왔다. 일부는 이를 두고 '콴텀 오브 솔래스가 본 얼티메이텀을 베낀 증거'라고 우기지만 위의 사진들을 비교해 보면 그렇게 주장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콴텀 오브 솔래스(2008)'

그런데, 여기까지가 전부가 아니었다. 클라이브 오웬까지 영화 '인터내셔널'에서 지붕 위에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지붕에 올라가면 뭐가 나온다고 다들 환장해서 기어올라가는 지 모르겠지만... 그래, 다 올라가라!

클라이브 오웬은 아예 옷 색깔까지 '리빙 데이라이트'의 티모시 달튼이 입었던 것과 비슷하게 맞춰 입었다.


▲'리빙 데이라이트(1987)'의 티모시 달튼


▲'인터내셔널(2009)...옷까지 비슷하다

그렇다면 '인터내셔널'이 'JAMES BOND IMITATION'이라는 의미냐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문제될 게 전혀 없다. 클라이브 오웬이 제임스 본드가 될 자격이 충분히 있는 배우인 데다 '차라리 오웬이 제임스 본드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007 시리즈와 겹치는 부분을 '팬서비스'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클라이브 오웬의 '제임스 보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브 오웬 본인은 '인터내셔널'을 촬영하면서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했다. 말쑥한 차림의 제임스 본드와 차별화 되고 싶었는지 오웬은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루이 샐린저를 연기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이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 영화와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터내셔널'이 007 시리즈처럼 액션비중이 높은 영화라는 건 아니다. '인터내셔널'은 얼핏 보면 격렬한 액션씬이 자주 나오는 제법 화끈한 액션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액션씬이라고 할만 한 장면은 딱 한 번 나오는 게 전부인데, 이 마저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별 의미없는 총격전이 쓸데 없이 오래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졌다.


▲총을 열심히 쏘긴 하지만...

그러므로 총격전, 카체이스씬이 풍부한 액션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액션위주의 스피디한 스릴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와 트레일러가 영화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터내셔널'은 거대은행의 비리와 음모를 파헤치는 진지한 성격의 수사-스파이 영화일 뿐 쏘고 들이받고 터지는 액션영화쪽과는 거리가 멀다. 스토리 설정만 놓고 보면 제임스 본드 영화와 매우 비슷하지만 액션의 비중이 낮고 보다 진지하고 사실적인, 굳이 쟝르로 구분하자면 '액션/스릴러'가 아니라 '드라마/서스펜스'에 해당되는 영화다.

지금같은 시기에 은행을 몹쓸 범죄집단으로 삼았다는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꽤 될 듯.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루이 샐린저(클라이브 오웬)와 지방 검사 일리너(나오미 와츠)와의 로맨스가 빠졌다는 점이다. 거친 키스씬이나 베드씬 같은 것은 필요없다 하더라도 잠시나마 긴장을 풀어주는 약간의 로맨스는 나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루이와 일리너의 관계는 지극히 사무적일 뿐이었다. 유머와 로맨스 같은 것을 철저하게 떼어낸 매우 'DRY'한 수사-첩보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너무 밋밋해 보였다. 반드시 키스씬, 베드씬이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판에 박은 듯한 베드씬에 질릴대로 질린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메인 여자 캐릭터를 남편과 자녀를 둔 유부녀로 정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원천봉쇄를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혹시 제임스 본드와 본드걸로 오해받는 게 싫어서 의도한 것일까?

아니, 오해 받으면 좀 어때서??


▲일리너(나오미 와츠), 루이(클라이브 오웬)

제임스 본드 영화 '콴텀 오브 솔래스'가 극장에서 내려진 직후에 개봉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이 더욱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보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던 영국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영화에 출연한 것이니 문제될 것은 없다. 개나 소나 제임스 본드를 따라하는 판인 것에 비하면 클라이브 오웬의 '인터내셔널'은 양반이다. 제임스 본드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무척 잘 어울려 보였으니까.

스토리를 좀 더 세련되게 다듬고, 약간의 유머와 로맨스를 곁들였더라면 더욱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볼만 했다. 화끈한 액션도 없고, 격렬한 카체이스도 나오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도중에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지지는 않았다. 아주 잘 만든 스릴러 영화라고 하기엔 곤란할지 몰라도 이 정도면 NOT-TOO-BAD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클라이브 오웬이 제임스 본드 스타일의 스파이 스릴러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는 점이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겠지만 훤칠한 키의 핸썸한 영국배우 만큼 스파이 쟝르에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클라이브 오웬을 리딩맨으로 하는 인터내셔널 에스피오나지 영화/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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